(장성)청백리에 학문으로는 장성만한 곳이 없으니 꼿꼿한 자존심의 바탕
문불여장성(文不如長城),문장으로는 장성 만한 곳이 없다는 말입니다.흥선대원군이 호남을 평하는 가운데 '호남팔불여[=인불여 남원(人不如),지불여 순천(地),결불여 나주(結),곡불여 광주(穀),전불여 고흥(錢),호불여 영광(戶),여불여 제주(女)]'를 말하면서 '문불여 장성(文)'이라 하여 "학문으로는 장성만한 곳이 없다"라고 하였다는 데에서 유래합니다.장성은 남도의 학문,정신의 고향으로 문불여장성의 정신이 집약된 곳은 서원입니다.
학문과 선비의 고장 장성답게 곳곳에 필암서원, 고산서원, 봉암서원 등 서원과 사우가 많습니다.특히, 황룡면 필암리에 자리 잡은 필암서원은 호남 지방의 유종(儒宗)으로 추앙받는 하서 김인후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장성 사람들의 꼿꼿한 기질과 은근한 자존심의 바탕이 되어 왔습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된 8개 서원 중 하나이자 하서 김인후의 활심의 뜻이 담긴 필암서원, 시대의 문제를 고민했던 성리학의 마지막 거장, 노사 기정진을 모신 고산서원, '화차'로 행주대첩 승리를 이끈 선비 과학자, 망암 변이중을 기리는 봉암서원까지 장성의 서원들은 단순히 교육기관에 머물지 않고 세상과 조응하며 시대가 가야 할 옳은 방향을 제시하고자 했습니다.
남도 정신의 한 축을 이룬 선비의 정신과 그 정신을 절차탁마하게 한 장성의 서원, 지금 이 시대에 더욱 더 필요한 서원의 가치, 그 '오래된 미래'들을 확인해보고자 장성으로 향합니다.
- 일시: 2024-10.8 20:00 ~10.9 14:00
- 날씨: 약간의 비와 짙은 안개
- 몇명: 홀로
▷ 답사일정(風輪) :580km
아곡 박수량 백비 :전남 장성군 황룡면 백비길 33-17
필암서원:전남 장성군 필암서원로 184
장성황룡전적비: 전남 장성군 황룡면 물뫼길 25
장성 김인후 신도비 :전남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 산25번지
봉암서원:전남 장성군 장성읍 화차길 159
칠현유적비:전남 장성군 서삼면 모암리 424
2024.10.8 20:30
9월은 추석 연휴가 있어서 여행을 가지 못했습니다.이번주 토요일 여행을 가려고 계획하고 있었는데 한글날 공휴일 덕분에 일정을 앞당겨 출발했습니다.11시쯤 천안방향 주암휴게소에서 휴식을 취했습니다.
2024.10.9 05:00
새벽에 일어나 다시 장성 박수량 백비를 보고자 출발하는데 안개가 자욱하여 안전에 각별히 신경을 쓰며 운전했습니다.
▷장성 박수량 백비
장성 박수량 백비는 조선 명종때의 문신 박수량(1491~1554)의 묘비입니다.박수량은 중종9년(1514)에 과거에 급제한 후 호조.예조.형조.공조 판서, 한성부 판윤,좌참찬.우참찬, 함경도와 전라도 관찰사 등의 벼슬을 지냈습니다.박수량의 시호인 정혜(貞惠)의 정(貞)은 곧다는 의미로 청렴결백하다는 청백수절(淸白守節)에서 가져왔으며,혜(惠)는 백성을 사랑하여 백성이 친부모처럼 따랐다는 뜻이 담긴 애민호여(愛民好與)에서 가져왔습니다.
시호만 보더라도 박수량의 39년 청렴한 공직 생활상이 잘 드러납니다.또한 명종은 백비와 청백당을 내려주었는데 백비에 아무 글자도 새기지 않은 이유는 그의 청빈한 삶과 정신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무덤과 상석 사이 흰 비석이 백비입니다.
"박수량의 청백을 알면서 빗돌에다 새삼스럽게 그가 청백했던 생활상을 쓴다는 것은 오히려 그의 청렴을 잘 못 아는 결과가 될지 모르니 비문없이 그대로 세우라." (명종 임금)
우리나라는 고구려시대부터 청백리를 표창한 기록이 있으며 조선시대 총 218명의 청백리가 선발되었습니다. 감사원이 선정한 조선시대 3대 청백리는 박수량,황희,맹사성입니다.백비를 뒤로 하고 앞산을 바라보니 안개로 인해 산세의 실루엣만 보입니다.한폭의 동양화를 감상하게 됩니다.
명품백을 수수해도 처벌 할 수 없다는 공무원인 국민권익위원회, 무혐의라는 검찰을 보면 세상이 많이 혼탁해졌습니다. 천지비天地否 세상의 공무원답습니다.
▷필암서원
조선시대 서원중에서 소수서원,남계서원,옥산서원,도산서원,필암서원,도동서원,병산서원,무성서원,돈암서원의 9개 서원이 2019년 7월 제 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한국의 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유산목록에 등재되었습니다.
필암서원은 조선의 대학자인 하서 김인후(1510~1560)선생의 학덕과 정신을 추모하기 위해 1590년 장성읍 기산리에 창건되었습니다.1597년 정유재란때에 불타 없어졌으며 1624년 다시 증산동 마을에 건립했으나 지형이 낮고 물난리가 나자 1672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습니다. 1662년 현종 임금때 필암(筆巖)이라는 사액을 받았으며 평탄한 지형에 전학후묘의 서원배치를 보여줍니다.
주역 64괘 天地否(천지비)괘가 있습니다.난세에 처하는 도를 말하는데
비(否)는 색야(塞也), 즉, 否는 막힌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보면 통치자와 백성 사이에 의사소통이 안 되는 것, 비색한 것, 막힌 것을 말합니다.이 때에는 사회질서가 어지러워집니다.
안으로는 유약하고, 밖으로는 강건하다. 이것은 안으로는 약하면서 밖으로는 강한 척 하는 것으로, 비(否)는 소인지괘(小人之卦)로 밖은 물러나고 안은 들어오는 것이니 나라안에 소인(小人)이 득실거리는 형상입니다.
否 否之匪人 不利君者貞 大往小來(비 비지비인 불리군자정 대왕소래)
‘비괘’는 꽉 막혀 통하지 않음을 상징합니다.막혀서 통하지 않는 것은 정도가 아니므로 군자가 정의를 지키기에 불리합니다. 양기는 올라가고 음기는 내려옵니다. 즉, 음양이 어긋나고 천지가 꽉 막히는 괘의를 밝힙니다.
한마디로 요즘같은 세상입니다.이런 세상에서 출사를 하면 역사적인 오명을 뒤집어 쓸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서 김인후도 천지비괘의 시대에 출사하지 않았습니다.
인종의 절친 하서 김인후는 "국정농단세력이 내린 관직은 받지 않았습니다."
비운의 왕 인종(1515~1545:재위 1544~1545)이 절친이자 스승인 신하 하서 김인후에게 내린 묵죽도입니다.흔히들 이상적인 군신관계를 "물고기(신하)가 좋은 물(임금)을 만나 마음껏 헤엄친다"는 뜻에서 어수지계(魚水之契)라 하는데 이와 같은 인종-김인후의 군신관계를 알린다는 뜻에서 묵죽도 그림을 나무판에 새겨 유통한 것입니다.
김인후는 31살때인 15401년(중종35년) 대과에 급제했는데 세자(훗날 인종) 교육기관인 세자시강원의 설서(정7품)가 됐습니다.세자와는 5살 차이였지만 곧 절친이 됩니다.인종은 태어난지 7일만에 친모(장경왕후:1491~1515)를 산후증으로 잃고,1520년(중종 15년) 책봉이후 세자 신분으로만 25년간이나 살았습니다.새어머니 문정왕후(1501~1565)에게도 아들(경원대군,훗날 명종)이 있었습니다.문정왕후는 자기가 낳은 아들을 옥좌에 올려 놓기 위해 혈안이 되었고 인종의 세자 생활은 늘 위태로웠습니다.
인종의 치세는 8개월 단명으로 끝나고 맙니다.공식적인 사인은 "지나친 효도 때문에 얻은 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필시 곡절있는 죽음이었습니다.문정왕후는 이질에 시달린 인종에게 이질과 상극인 닭죽을 매번 바쳤고,독이 든 떡을 먹게 했다는 이야기까지 떠돌았습니다.
인종이 죽고 난 후 김인후는 기일이 다가오면 실성한 사람처럼 술을 마시고 통곡했다고 합니다.김인후는 여러번 명종의 부름을 받았지만 명종때 문정왕후,윤원형,정난정 등 국정농단 세력이 내린 벼술은 거부한다는 강력한 뜻을 전했습니다.
김인후는 정조때인 1796년(정조20년) 호남지방에서 유일하게 문묘에 배향되었습니다.
"김인후는 비 갠뒤의 맑은 달과 밝고 부드러운 바람(光風齊月)같은 기상과,순결하고 온향한 품성(精金美玉)에 문장까지 겸비해서 선비들의 모범이 됐다"고 극찬을 받았습니다.
인종의 치세가 이어지고 김인후가 같이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크게 남습니다.
뿌리와 가지, 마디와 잎새가 모두 다 정미하니(根枝節葉盡精微)
바위를 친구 삼은 뜻 여기에 들어 있습니다.(石友精神在範圍)
비로소 성스러운 우리 임금 조화를 짝하심을 깨닫노니(始覺聖神伴造化)
천지와 함께 뭉쳐 어김이 없으십니다.(一團天地不能違)
(인종이 하사한 묵죽도 화축에 하서가 지은 시)
천지비괘를 국제적으로 넓혀보면 네탄냐후 아래의 이스라엘 인재들도 떠나갑니다.
이스라엘이 저항의 축이라는 하마스,헤즈볼라,예멘의 후티,시리아 정부,그리고 다수의 팔레스타인 무장단체들에게 이겨도 지게 됩니다.세상엔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요인 암살을 하면서 권총이 아닌 미사일이나 폭탄으로 하다보니 근처에 있던 죄없는 민간인들도 강제로 순장시키듯이 많이 죽이고 있습니다.미래의 적을 키우고 있는데 지금도 하마스 대원의 85%가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부모를 잃은 고아들인데 더 늘어나겠죠.그리고 국민들이 떠납니다.네타냐후 정부의 극우화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떠나고 있는데 특히 인재들이 천지비괘의 세상에서 살수 없어서 나라를 떠나기 때문입니다.
이른 새벽에 벌써 하천에서 다슬기 혹은 고동같은 것을 채집하는 분들이 보입니다.저도 어릴때 많이 해보았던 일입니다.
▷장성 황룡전적비
잘못된 정치와 행정을 일삼던 벼슬아치를 나무라며 시작한 동학혁명 투쟁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으로 동학군이 전주성을 점령하는 계기가 된 황룡전투의 전적지입니다.동학군이 대포와 서양식 양총으로 무장한 관군과 싸워서 대포 2문과 양총 100여정을 빼앗고 선본장 이학승과 다수의 관군을 살해했습니다.동학군이 승리하게 된 배경에는 "장태"라는 신무기가 위력을 떨쳤는데 장태는 장성 접주 이춘영의 지도 아래 대밭에서 대나무를 쪼개어 원통형의 닭집을 만들어 그 안에 볏짚을 넣어 굴리면서 방패로 사용하며 적진으로 돌진했습니다.
전적비를 보면 죽창 형태의 기념비 아래 동학군들이 장태를 굴리며 진격하는 형상입니다.
황룡에서 최대의 승전을 이룩한 동학군은 전라도의 수부인 전주를 점령하고 서울로 진격을 도모하자 전라감사는 전봉준과 회담하여 전라도 전역에 집강소를 설치해 농민통치를 실시했습니다.비록 일본군의 침략으로 좌절되었지만 동학혁명은 한국 근대사의 서막이요 민주운동과 민족운동의 원동력으로 역사발전을 주도하였습니다.
동학군은 4대강령으로
1)사람이나 생물을 함부로 죽이지 말라
2)충과 효를 함께하여 세상을 건지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
3)왜와 서양 오랑캐를 물리쳐 우리도(道)를 밝힌다.
4)군대를 몰고 서울로 진격하여 권신과 귀족을 모두 없앤다.
▷장성 김인후 신도비
도로 옆에 큰 비각이 보입니다.저절로 자란 야생화가 흡사 비석 앞에 꽃을 놓아둔 듯 피어 있는데 신도비의 크기가 상당합니다. 1742년 세운 신도비로 비의 글은 1682년 송시열이 10년을 걸쳐 지은 명문장이라고 합니다.
신도비문에 "하늘이 우리나라를 도와 도학과 절의와 문장을 모두 갖춘 하서 김선생을 태어나게 했고,태산북두와 같은 백세의 스승"이라고 쓰여있습니다.
문불여장성(文不如長城),문장으로는 장성 만한 곳이 없다는 말은 김인후의 존재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 봉암서원
망암 변이중 선생(1546~1611)을 주향으로 하고 윤진,변윤중,변경윤,변덕윤,변휴,변치명 등 여섯분을 종향하면서 그분들의 학문과 정신을 추모하고 서생들을 가르쳤던 교육기관입니다.
변이중 선생은 이곳 봉암마을에서 태어났고 28세때 과거에 합격하여 호조,이조 좌랑,형조,예조 정랑,군기,종부 시정과 황해,평안도 도사,풍기,함안군수등을 두루 거쳤습니다.
특히 국방과학의 선구자로 왜군의 조총에 맞설 무기인 화차 3백대를 제작하여 행주산성의 권율 장군에게 보냈고 ,그 결과 적은 병력으로 외군을 물리친 행주대첩에 결정적으로 이바지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국방과학연구소와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나라가 일본보다 공군력이나 해군력에서 전투기와 함정의 숫자측면에서 부족할 수도 있지만 현무-5같은 탄도미사일이 있는 점은 강점입니다.
▷ 칠현유적비
7개의 비석이 나란히 있는데 원래 이 자리는 모암서원이 있었던 자리입니다.고려시대 고종 임금때의 절효공 서능 선생,아곡 박수량,율정 최학령,양산군수 조영규,하곡 정운룡,처사 조정로,추담 김우급 선생 등 일곱분의 작은 비석이 있습니다.
고려시대 재상이며 한국 최초의 가훈 "거가십훈居家十訓"을 남겼고,효자로 알려진 서능 선생은 이곳에서 모암정사를 짓고 학문을 갈고 닦으며 제자를 길렀다고 합니다.
장성은 한반도의 서남단으로 부산에서 가보니 왕복 580km로 생각보다는 체감 거리가 멉니다.북으로는 노령산맥이 경계이고 영산강의 3대 지류인 황룡강이 관통하고 있습니다.
시쳇말로 벌교에서 주먹자랑하지 말고,여수에서 돈 자랑하지 말고, 장성(長城)에서는 문장이 으뜸이니 결국 인물 자랑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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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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